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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 & 의마총

나정희 2015. 12. 16. 12:38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월파 유팽로 장군!

곡성이 낳은 구국 충절의 인물이다.

 

 ( 월파 유팽로 장군 고향 합강마을 벽화)

 

임진왜란 당시 호남 최초의 의병장 월파 유팽로(1554~1592) 선생은 전국 최초의 의병장이면서 곡성이 낳은 구국 충절의 인물이다.

집에서 3분 거리에 위치한 옥과면 합강리는 의병장 유팽로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발자취를 찾아 잠시 다녀왔다. 

 

 

 

월파 유팽로 - 백과사전 발췌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 개국공신 유만수(柳曼殊)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유경안(柳景顔)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梁大樸)·안영(安瑛) 등과 함께 궐기하였여, 피난민 500명과 가동(家偅) 100여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高敬命)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고경명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고경명 휘하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당시에 기호지방에 돌린 격문을 지었는데, 그 격문이 『정기록(正氣錄)』에 실려 있다.

호남의병들은 처음에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전주를 침입하려 하자 금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전투에 앞서, 적의 수만의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분거(分據)하였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패전하였다.

일단 탈출한 그는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그를 일단 구출하고는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光州)포충사(褒忠祠)와 금산 종용당(從容堂)에 제향되었다.

 

   

옥과천이 흐르는 다리는 오랜 세월을 말해준다. 이곳 다리는 5.18 영화 속 촬영지다.

곡성 입면과 옥과 합강을 이어주는 다리다. 강줄기는 흘러 함허장을 앞을 가로질러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옥과천 넘어 바라 보이는 합강마을은 평온한 마을이다.

마을 뒤쪽으로 높지 않은 옥출산이 있다. 호남정맥 쾌일산에서 뻗어 옥과 설산과 옥출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의 끝자락이다.

옥출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멀리 호남의 산맥을 조망할수 있으며 가깝게 섬진강의 강줄기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조망이다. 

 

 

 

마을입구에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월파 유팽로 장군 탄생지 '합강마을' 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조선 최초의 의병장 탄생지이며 곡성이 낳은 구국 충절의 고장이다.

 

 

 

마을 입구에는 합강 보건소와 마을 어르신들이 오손도손 얘기 나눌수 있는 합강정과 마을 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회관 앞에는 충절의 길이 있다. 월파 유팽로 선생 사당가는 길이다.

충절의 길에는 그때 당시의 벽화를 길을 따라 묘사해 놓았으며 유적으로 정열각과  단비, 생가터, 시비가 있다.

 

  

 

 

 

 

 

 

 

 

 

 

 

합강마을 회관 옆으로 충절의 길을 따라 다양한 주제의 벽화가 담벼락에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그때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와 상황들을 묘사하며 사실적으로 그려 놓은듯 하다.

중간 깃발에는 의병 진동장군 유팽로 란 깃발도 선명하다.

지금은 고장의 자랑이자 훌륭한 유산으로 잘 보전되고 있었다.  

 

 

 

벽화 담벼락이 끝나면 충절의 길을 따라 조금만 들어 가면 유월파 정열각과 도선사가 나온다.

 

 

 

 

 

 

장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인조 3년에 세웠다는 정렬각이 있다.

월파 유팽로 의병장과 부인 김씨의 충혼을 기린다고 한다. 

전남 곡성 옥과현(지금의 곡성 옥과면 합강)에서 태어난 유팽로는 문과에 급제해 정 7품 홍문관 박사에 발탁되지만

권력층의 비리를 거침없이 비판해 종 9품 성균관 학유로 좌천된다.

그는 왜침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 반란군 만나고, 이들을 교화시켜 의병으로 만든다.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패배 의식 속에서 제 기능을 잃은 관군이 연전연패하는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던 월파 유팽로라는 인물이다.

 

 

 

 

정렬사 바로 옆에 제사를 지내는 도선사가 있다.

지금은 주변에 무성한 잡초만이 안타까움을 전한다.

후세의 역사에 잊히지 않을까 염려된다.

 

 

 

의병장 유팽로 장군의 묘소는 남원 대강면에 있다.

여기는 제사를 모시기 위한 단이 설치되어 있다.

 

 

월파 유팽로 장군이 6살 때 썼다는 시다. 정렬각 오른쪽에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유팽로 장군은 39세의 짧은 나이로 금산전투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그의 삶은 후손들에게 큰 귀감으로 이렇게 남겨져 있다.

 

 

 

합강마을 하천을 건너 입면 송전리 소재에 가깝게 보이는 곳에 죽음으로 의를 지킨 '의마총' 이 있다.

그때 당시의 행정구역은 같은 마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사는 동네 마을 앞쪽에 의마총의 무덤이 있다.

의마총(義馬塚) 임진왜란 때 유팽노 장군은 성균관 학유로 재입하다. 낙향하여 곡성, 남원, 담양 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근왕 의병활동 중에 왜군을 맞아 싸우고 임진년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장군의 충마 오려마는 순절한 장군의 머리를 입에 물고 300리 밤길을 달려 장군의 생가인 합강리에 나타나 부인에게 건내주고 울부짖다 죽으매, 부인과 마을 사람들이 충마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 송전리 들판에 말 무덤을 만들어 주고 '의마총'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 동네가 역사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곳인줄 몰랐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좋은 곳을 나두도 먼 곳만 찾아 다녔으니...  이제부터 내 주변 부터 알리는데 자랑해야겠다. 

집에서 3분 거리 합강마을 의병장 월파 유팽로 장군을 다시 알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